인간은 늘 자신이 짓지 못할 것을 먼저 상상했다. 바벨탑이 그랬고, 아틀란티스가 그랬다. 상상이 설계가 되고 설계가 건축이 되기까지 수백 년이 걸리기도 했다. 그 간극— 상상과 실현 사이의 거리— 이 인간적 시간의 핵심이었다.
기계에게 그 간극은 없다. 명령과 이미지 사이에 고민도 없고 좌절도 없다. 「구조」의 도시들은 그렇게 태어났다. 인간이 축적해온 이미지의 총합에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 풍경이 출력된다. 그 풍경은 경이롭되 체온이 없고, 압도적이되 거주를 전제하지 않는다.
이 이미지들이 경이로운 동시에 불안한 이유는 단순하다. 꿈꾸는 주체가 바뀌면 꿈의 성질도 바뀐다. 인간이 꿈꾸던 미래에는 그 미래에 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. 기계의 미래에는 그것이 없다. 감탄과 두려움 사이에서 우리가 서성이는 이유다.
특이점(singularity)은 기계의 지능이 인간을 초월하는 순간을 가리킨다. 학자들은 그 순간이 오면 세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. 그러나 달라진 세계는 어떤 모습인가.
「특이점」은 그 직후의 일상을 그린다. 약국에 약사가 없고, 교실에 교사의 체온이 없고, 농경지에 농부 대신 드론이 있다. 카페의 열 자리에는 열 개의 화면이 놓여 있고, 쇼핑몰의 스크린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물건을 팔고 있다. 이 장면들은 아직 현실이 아니다. 그러나 이 풍경을 상상하는 데 아무런 노력이 들지 않는다. 거부감도 없다. 그것이 이 연작이 포착하려는 지점이다— 특이점의 진짜 기괴함은 풍경 자체에 있지 않다. 그 풍경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 안에 있다.
이 연작에서 인간은 사라지지 않았다. 지친 표정으로 민원실에 앉아 있고, 혼자 로봇 개를 끌고 산책하고, 1인 식사 부스에서 푸른 빛 아래 밥을 먹고 있다. 사라진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접촉면이다.
한때 모든 것에 마찰이 있었다. 편지를 쓰려면 잉크가 마르는 시간이 필요했고, 음악을 들으려면 바늘이 홈을 긁어야 했고, 누군가를 기다리려면 올지 안 올지 모른 채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. 그 마찰이 시간의 실체였다.
「이전」은 마찰이 있던 시간의 잔상이다. 흑백으로 변환된 이미지는 색이 빠진 것이 아니라 기억의 방식으로 재구성된 것이다. 우리가 과거를 떠올릴 때 색보다 먼저 오는 것— 빛의 방향, 공기의 무게, 사물의 윤곽— 이 흑백의 질감 안에 있다.
이 풍경들이 따뜻한 이유는 그 안에 있던 것 때문이 아니라, 지금 거기에 없는 것 때문이다.
1897년 타히티에서, 폴 고갱은 자신의 마지막이 될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. 가장 큰 캔버스에 제목을 직접 새겨 넣었다—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, 우리는 누구인가,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. 인간 존재의 기원과 정체와 방향을 하나의 문장에 압축한 이 질문은 미술사에서 가장 무거운 제목이다.
나는 이 질문을 바둑판에 숨겼다. 고갱의 제목을 이진 코드로 변환하고 흑백 돌의 배열 속에 넣었다. 해독하지 않으면 바둑 기보로 보이고, 해독하면 질문이 나타난다— 잠상의 구조 그 자체다. 그 바둑판을 둘러싸고, 기계에게 같은 장면을 다시 그리게 한 이미지들이 걸린다. 레퍼런스를 지정한 것도, 조건을 설계한 것도, 이 구조에 의미를 부여한 것도 나다. 기계는 그것들을 조합해 유사하지만 유일한 이미지를 출력할 뿐이다.
기계는 이 질문의 무게를 모른다. 기계에게 이것은 텍스트이고 패턴이다. 그러나 기계가 출력한 이미지 앞에 서면, 질문은 다시 작동한다. 129년 전 한 인간이 절박하게 던진 질문이, 그 질문의 무게를 모르는 기계를 경유하여 다시 여기에 도착해 있다. 질문을 던진 것은 나이고 그린 것은 기계인데, 그 앞에 선 사람은 당신이다.